(영화 공부가 여러 의미로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 학생 mithrandir
1. 작년 말에 있었던 일 하나. 서울의 한 극장에서 영화제가 있었는데, 그 영 화제 상영작 중에는 제가 존경하는 어느 선생님의 작품 한 편도 포함되어 있 었습니다. 그런데 그 영화제의 자료집에, 선생님의 작품에 대해서 몇몇 잘못된 정보가 들어가 있는 겁니다. 당연히 기분이 좋으실 리는 없겠죠. 그리고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선생님께 미리 직접 확인만 했다면 간단히 해결될 부분 들이었는데, 대체 어디에서 이런 잘못된 정보를 듣고 적어넣은 걸까 하구요.
저도 기분이 좋지 않더라구요.
며칠 뒤, 광화문을 지나다가 어느 정종집 창가 너머에 계시는 선생님을 우연히 마주쳤습니다. 아니 이런 반가울 데가 있나요. 문을 열고 인사드렸더니 " 마침 연락할 참이었는데 잘 되었다"는 선생님. 무슨 일이었나 했더니, 자료집에 들어간 잘못된 정보의 출처를 찾아내셨다는 겁니다. 그리고 꺼내드신 문제의 자료는... 세상에. 다름아닌 제 블로그의 글이 인쇄된 A4지 묶음이었습니다! 결국 "내부의 적"이 다름아닌 저 자신이었덤 셈.
어찌된 일인고하니, 그 영화제의 자료집을 만드신 분들은 인터넷에서 선생님 작품에 대해 검색을 해 보았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검색엔진 맨 첫 줄에는, 몇 달 전 여름, 선생님의 작품을 보고 제가 적었던 몇마디 글이 떠있었던거죠. 학교 수업을 마치고 돌아와 제가 적는 몇몇 글들이 그렇듯이, 읽기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비문과 부정확한 표현의 단어들이 섞여있는 내용이었구, 그분들은 그걸 확인도 안하고선(자막 작업 때문에 선생님이 하루가 멀다하고 그곳을 드나드셨는데도 불구하고!) 자료집에 그대로 써버렸습니다. 결국 그 결과는, 존경하는 선생님을 본의아니게 배신해버린 배은망덕한 제자의 파란만장한 이야기.
네, 물론 좀 과장된 표현입니다. 자료집은 그 전에 수정이 되었고, 선생님도 제 글에 대해서 허허 웃으시면서 넘어가주셨구요. 오래된 글이지만 검색엔진으로 들어와 읽는 사람들이 또 있을 것에 대비하여, 글의 잘못 적힌 부분들에 대해서는 선생님과 상의를 거쳐 수정을 해두었습니다. 하지만 일이 해결된 것과는 별개로, 당시에 제 생각은 딱 둘이었습니다. 첫째는 "선생님께 죄송하다 ". 그리고 두번째는 "블로그를 없애버릴까?".
2. 아마도 많은 블로거들은 한 번 쯤 이런 생각을 해 볼 것입니다. "대체 내 가 이 짓거리를 왜 하고 있는 거지?" 내가 블로그를 운영하는 게 아니라 블로그가 나를 운영한다는 생각이 드는 시점이 한 번씩 꼭 있죠. 글을 올리는 것이 의무가 되고 부담이 되는 시점. 하지만 이게 강박관념이 되지 않고 적당한 선이 된다면, 그렇게 나쁘지만도 않다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많은 이들에게 보이고 싶은 글이라면, 사람들이 더 많이 봐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건 당연하죠. 그리고 많든 적든 사람들이 와주는 블로그라면, 글을 주기적으로, 유용하게 써야겠다는 의무감은 오히려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블로그라는 틀을 빌어 다른사람들과의 의사소통과 유희를 즐기겠다고 나섰으니, "열심히 글 올리기"는 그것을 위한 일종의 규칙일 수도 있겠죠.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고, 유희를 더욱 즐겁고 풍성하게 하기 위한 규칙. 그 규칙이 부담스럽다면, 방문객에 신경쓰지 않고 더 가볍고 개인적인 공간을 운용할 수도 있는 거구, 아니면 블로그를 그만두고 오프라인의 생활에 집중한다거나, 다른 형태의 홈페이지를 모색해볼 수도 있는 거구요.
자신이 즐겁기 위한 글쓰기가 다른 사람을 만족시키는 데 치중한다면, 주객이 전도된 것 아닐까요? 하지만 자신이 즐겁기 위한 글이라고 해도, 그것이 혼자 보고 하루만에 삭제해버릴 일기가 아닌 이상은 이미 다른 이들을 의식하고 있는 글일 겁니다. 정보이든, 일상의 잡담이든, 전문적인 분석, 사회나 정치에 관한 글, 비평, 그리고 글이 아닌 사진들까지... 인터넷에 올리는 글은 항상 나 자신을 위한 것인 동시에, 다른 이들을 의식하고, 다른 이들을 위하는 글이기도 합니다. 쉽게 말해서, "같이 재미있자"는 것이니까 책상 서랍의 비밀 일기장이 아닌 블로그에 글을 올리는 것이겠죠.
3. 하지만 그런 것과는 또 다른 부담감이 있습니다. "다른 이들의 기대를 만족시켰으면"하는 부담감과는 또 다른 종류의 부담감. 바로 내 한마디 한마디가 너무 "멀리" 퍼져나가버리고, 의도와는 달리 너무 "큰 힘"을 가져버린다는 부담감. 위에서 제가 든 예가 그렇듯이, 가볍게 적은 글 하나가 순식간에 "공신력을 가진 믿을만한 정보"로 탈바꿈해버리고는 합니다. 하지만 내가 별 생각없이 올렸던 그 정보에, 오류가 있다면? 또는 나의 생각이 악용당하거나, 잘못 읽힌 나의 글이 왜곡되어 인용된다면? 물론 글이란 항상 책임을 가져야 하는 것이죠. 하지만 그 책임의 정도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블로그라는 공간을 순수하게 객관적인 정보와 세세하게 다듬어진 칼럼 형태의 글로만 꾸미는 분들도 계시지만, 우리는 블로그에 아주 주관적인 주장을 올리 기도 하고, 추측을 쓰기도 하며, 밤새 작업에 시달리던 스트레스를 푼답시고, 끄적이는 오타 투성이 잡담으로 시간을 때우기도 합니다. 이런 글들이 눈덩이 처럼 불어나 엄청난 영향력을 갖게 되는 경우, 대체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 걸까요? 공개된 인터넷 공간에는, 항상 전문가에게 검증되고 사실 확인을 완벽하게 끝냈으며 철저하게 객관적인 내용을, 오타 하나 없는 말끔하고 정확한 문장으로만 적어서 올리고, 그 내용에 변동사항이 없는지 일주일에 한 번씩 체크를 해주어야 하는 걸까요?
4. 아마 누구라도 간단하게, "아니요, 당연히 그럴 필요가 없죠. 이런 문제는 당연히 제 글을 읽고 받아들이는 사람의 문제입니다. 누가봐도 사적인 글이고 실수가 있을 수도 있는 글을, 사실 확인도 없이 인용하거나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는 사람들의 책임이죠."라고 말할 겁니다. 아니, "누구라도"라는 말은 이상할까요? 어쨌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런 "간단한" 해답이 생각처럼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알 것입니다. 나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어딘가에서 주장의 근거가 되고, 리포트의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어떻게 신경이 안쓰이겠습니까? 누구도 저한테 책임지라고 하지는 않겠지만, 어딘가 퍼지고 있을 루머와 누군가 써대고 있을 엉망진창의 리포트는, 다름아닌 제가 그 원흉인걸요. 이런 생각 속에서 "와, 사람들이 내 글을 많이도 읽는 걸?"하는 뿌듯함을 느끼기는 커녕, 훔쳐보기의 대상이 된다는 불안함, 그리고 막연하면서도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게 됩니다.
블로그는 도서관에 있는 책이 아닙니다. 하물며 공신력있는 기관에서 수많은 어르신들이 제작한 객관적인 전문 자료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인용할 때는 명확한 확인 과정을 거쳐야하고 그것을 읽을 때는 자신만의 뚜렷한 주관을 가져야하겠죠. 그러나 나의 블로그에 적은 가벼운 글 하나하나는, 한 권의 책보다도 더 접하기 쉽다는 이유 때문인지, 그 한 권의 책보다도 더 넓고 빠른 전파력과 무거운 무게를 지니게 되어버렸습니다. 어떤 글들은 그 무게를 짊어지기엔, 너무나 가볍고 엉성하게 씌여졌는데도요.
5. (적어도 아직까지) 저는 블로그를 없앨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여러 글 들을 정리하고 남들에게 보일 수 있다는 점에서 여러모로 편리하고 즐겁거든요. 무엇보다도 블로그를 통해 많은 분들과 온라인상의 "만남"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그것이 꼭 오프라인으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충분히 의미있는 인간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한 주장들, 소식들, 잡담들을 뱉어내고 공감을 나누기에, 블로그란 너무나 편리하고 저에게 너무나 절실한 장소입니다.
하지만, 블로그를 "없앨" 생각은 없을지 몰라도, 가끔씩, 학교 생활로 바쁜 틈틈이 잠시 시간이 빌때면, 제 앞에 있는 모니터를 보면서 다시금 고민하게 될 것 같습니다. "나는 이걸 계속 해도 좋은 걸까?", 그리고 "책임감이란 무엇일까?" 라구요. 어쩌면 제가 블로그를 계속 운영하고 있는 것은, 아직 그 해답을 찾지 못하였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문제를 생각 해보셨나요? 그리고 그 해답을 찾아내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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