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 개발자 가짜집시
그는 ‘사장님’이 되었다#1 그러니까, 나도 그 사장님 소리 한 번 들어보겠다고
멀쩡한 직장 때려치우고 이 동네 후미진 골목 어귀에 바를 차린지도 어언 일년 하고도 반이 흘렀다. 딴에는 개성이라고 내부 조명을 암실 수준으로 어둡게 해놓고는 시커먼 간판까지 달아두었더니, (사실은, 멋진 인테리어를 차려놓을 돈이 없었던 것 뿐이지만) 꼭 고만고만하게 칙칙한 인생들 외에는 별로 찾는 사람이 없는, 그런 가게다. 물론 여느 가게나 별로 다를 바 없이 가끔 흘러간 옛날 노래로 가게 안이 가득 차기도 한다. 비오는 오후, 인적이 뜸한 시간에 찾아오는 단골 손님과 함께 라면을 끓여 놓고 소주잔을 기울이기도 하는 건 물론이다. 사실 술맛이 썩 좋은 것도 아닌데다 별로 말주변이 없어 손님들의 좋은 술벗이 되진 못하지만, 가끔 이렇게 만담을 늘어놓으면 좋아해주는 분들도 있으니 다행이다.
#2 어쨌건 파리들 숫자 보다는 손님들 숫자가 조금 더 많긴 하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작년에 탄핵인가 뭐시기인가 때는 가게가 미어 터질만큼 사람들이 몰려오기도 했다. 요 얼마전부터는 영수증 발행 누적 4만장을 달성한 기념으로 손님부터 사장까지 죄다 말놓고 지내는 야자타임 이벤트를 진행하고 있는데, 하루는 되는 대로 대충 섞은 술이 하필 이곳 상가에서 선정하는 '이오칵테일' (이 술 한번 먹어봐 오늘의 칵테일) 에 뽑히는 바람에 그날만 꼬박 3주치 손님들이 몰려온 적도 있다. (후에 정중히 앞으로는 사절하겠다고 의사 표시를 했다) 어쨌건, 내가 바란 숫자 만큼은 찾아오는 손님들이 있으니 이 가게, 그냥 순순히 문 닫진 않을 테다.
#3 이곳, 북해동 빙궁가(北海洞 氷宮街) 에는
나처럼 직장 때려치우고 사장질 한 번 해보겠다고 물장사에 뛰어든 대책없는 사장들이 꽤나 많다. 장사 잘 된다는 소문만 믿고 배포 좋게 시작했다가 파리만 날리고 있는 가게도 많지만, 체인점을 차려야할 정도로 성공한 가게들도 여럿 된다. 비록 잘나간다는 일촌동(一寸洞) 이나 인근동(隣近洞)에 비하면 가게 수는 물론 행인들도 적은 편이지만, 이 동네, 그래도 나름대로 장사 한 번 해볼만한 동네라 자부한다. 상가에서 무료로 최고급 인테리어를 꾸밀 수 있도록 지원도 해주니 가게마다 다들 개성이 넘치고, 저마다 비법과 손맛이 달라 똑같은 이름의 칵테일이라도 가게 마다 맛이 천양 지차로 다르다. 뭣보다도, 일단 미성년자는 사절이다.
#4 물장사에 몸을 담은 이라면 마땅히 더러 다른 가게 술맛도 보러 다녀야 한다
신자유주의가 물결치는 엄동 설한의 대한민국에서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핑계를 대지만, 사실 이곳의 많은 술집들 중에는 한 사람의 애주가로서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멋진 곳들도 많다. 유흥가에서 멀리 떨어진 한적한 곳에서 뜨개질이나 하며 커피를 파는 가게들까지도 돌아보려면 장사하는 시간보다 놀러다니는 시간이 더 많을 지경이다. (혹시 우리 가게 문이 오래 닫혀있다면 또 어디 한적한 곳 새로 창업한 가게에 앉아 시간 가는줄 모르고 주인장과 노닥거리고 있는 것이다) 지금, 계곡이라고도 부르는 거리에 나와 동네를 바라본다. 이 많은 가게들. 가게 마다 술. 술 마다 향기. 향기마다 저마다의 사연, 사연마다 꿈-. 그래, 제 가게 하나 차린 사람이라면 뉘라서 제 꿈 하나 담아두지 않았으랴. 누구의 꿈이 더 귀한지 감히 누가 무슨 잣대를 들어 말하랴. 결과 보다는 과정이라는데, 그저 꿈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만의 가게라면 그또한 쓸쓸하지 않으랴.
#5 사실은, 이 글을 쓰기 전에,
원래는 바 경영의 역사와 철학에 관한 논문 수준의 길고 긴 이야기를 준비했었다. 진짜다. 업계의 전문가들이나 알아들을법한 먼 나라의 희귀한 단어들로 도배된 글이었다. 브리태니커 백과 사전과 미리엄 웹스터, 그리고 위키페디아와 함께 일주일간 꼬박 밤을 새서 썼다. 진짜라니까. 하지만 그런게 뭐 그리 중요하겠나. 어차피 모두가 다른 술을 판다. 그리고 파는 술이 같아도 모두가 다른 술을 마신다. 한 잔의 술과, 그 술을 파는 술집이, 나에게, 당신에게, 그리고 술집 구석에 앉아 혼자 브랜디 글래스의 물기를 닦아 내고 있는 사장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해 너무 많은 말을 하지 말자. 혼합 증류주 판매업의 사회적 의무에 대해 너무 드세게 목소리 높이지 말자. 안그래도 이미 우리는 충분히 취했고, 평생 서서 도는 피곤한 지구도 우리 동네에선 맥주 한 잔 마시고 놀다 간단다. 배니바 부시와 미믹스와 팀 베르너스와 월드 와이드 거미줄과 확장성 마크업 언어와 진짜로 간단한 신디케이션과 풀뿌리 저널리즘을 위하여 건배!
#6 자- 이제 가게로 돌아가야겠다.
장사 해야지. 가게 너무 오래 비워두면 곤란하니까. 아참, 혹시 이야기 했던가? 이쪽 동네가 대개 그렇듯 우리 가게도 술은 모두 공짜고, 기본 안주 추가는 코멘트 한 개, 과일과 오징어는 트랙백 하나씩, 무가당 담배 클럽 회원과 이글루스 멤버십 회원, 그리고 20세기 소년 소녀들은 30% 할인이다. 어쨌건 나도 사장이니까 가게 홍보는 해야하지 않겠나. 비록 오늘도 자산 가치를 높이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는 '주식회사 나'의 근면한 CEO 와는 거리가 먼게 탈이지만, 뭐 어떤가. 이래뵈도 사장인데.
p.s. 잠곰님 친구분 가게는 저희 가게에서 왼쪽으로 30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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