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개발자이고 싶은 alphageek
얼마전, 미국에 있는 어린 조카가 제 블로그를 알게 되었습니다. "Cool blog name!"이라고 코멘트를 남겨 주었지만, 나중에 들은 얘기론 별난 이름이라고 식구들과 한참 웃었다고 합니다.
"Alphageek"는 사실 사전에는 안 나오는 단어입니다. 일반적으론 "괴짜", "기인" 등의 부정적 의미를 가졌지만 해커나 골수 엔지니어 사이에선 긍정적 의미를 갖는 "geek"에, alpha male (우두머리 수컷)에서와 같은 의미로 alpha를 붙여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한마디로 우두머리 geek인데, geek를 우리나라 말로는 뭐라 번역해야 할지 잘 모르겠네요. IT분야 책 출판으로 유명한 Tim O'Reilly가 alphageek라는 말을 자주 쓰는데 그는 대충 뭔가 새로운 시도를 앞서 하는 사람 정도의 의미로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주로 기술 분야에 국한되어 있고 이런 일을 업으로 하기 보다는 취미로 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제가 블로그를 첨 만들면서 블로그 이름을 뭘로 할까 고민했더니 옆에 있던 아내가 추천해준 이름이 바로 alphageek입니다. 조카는 비웃은 이름이지만, 의미를 아는 사람에겐 좀 잘난 척하는 것으로 들릴 수도 있는 이름이기에 망설였지만, 그래도 이 분야를 이해하는 아내가 저를 가장 잘 표현해주는 말이라고 추켜줘서 그냥 그걸로 정해버렸습니다. 그런데 이름을 이렇게 정하고 나니 새로운 부담이 생겼습니다. 바로 "alphageek"에 어울리는 글을 써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성격이 외향적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아는 사람들과 있으면 얘기하길 좋아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얘기가 거의 IT나 기술, [공상]과학, 새로나온 IT 제품 등에 국한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연예인이나 스포츠 얘기라도 나오면 아는 것이없는 저는 입을 다물어버립니다. 친구들 사이에선 그게 별 문제가 안되었는데 (그냥 "저 녀석은 원래 저런 얘기만 해" 정도...) 나이가 들게 되면서 회사에서 저보다 젊은 사람들과 식사하는 자리가 많아지게 되니 제가 좋아하는 얘기로만 대화를 독점하는 때가 많아져버렸습니다. 다행히 IT 분야의 회사이기 때문에 영 관심없는 얘긴 아니겠지만 그래도 상사가 자기가 관심있는 분야로만 대화를 한정시켜버리는 자리를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있겠습니까? 그래서 언젠가부터는 그런 상황이 올 때마다 맘속으로 부담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물론 제 팀원이 이 글을 읽는다면 "그래도 계속 그러면서..."라고 하겠지만요.
다시 블로그로 돌아가서, 첨 블로그를 만들 때는 제가 하고 싶은 얘길 그런 부담없이 맘놓고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건 맞습니다. 방문자 수에 스스로 얽매이지만 않는다면, 남들이 좋아하건 말건, 읽어주건 말건 자기가 하고 싶은 얘길 하면 되니까요. 그래서 alphageek라는 타이틀에 걸맞는, 짧고 가벼운 대화에서는 미처 드러내지 못하는 깊은 지식을 맘놓고 과시하는 글을 쓰겠노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글을 쓰다보니 제가 아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얘기가 사실은 그동안 술자리에서 아는 척했던 수준에서 그다지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진정한 alphageek라면 아무도 해보지 않았던 새로운 시도를 하고, 그 결과를 남들에게 알리는 글을 써야 할텐데 기껏 쓸 수 있는 글이라곤 뉴스 읽고 떠오른 생각이나, 최근에 새로 구입한 제품에 대한 평가 정도였습니다. 기껏 제가 스스로 만든 것에 대해 쓴 글은
대학교 때 만들었던 로봇이나
딸애와 놀며 만든 장난감에 대한 것 정도였습니다.
"사실은 회사에서 대단한 제품을 만들고 있지만 아직 이걸 블로그에 공개할 수는 없어서 그렇다"라고 자위해 보았지만, 회사에서 뭘 만들건 그건 직업일 뿐, 그것만으론 alphageek가 될 수 없는 것이죠. 그나마 회사에서 하는 일 조차도 직접 하기보다는 남에게 시키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예전에 비웃던 그런 관리자가 스스로 되어 간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전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회사에서 하는 일이건 아니면 순전히 취미이건, 스스로 뭔가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그래야만 머리가 굳지 않고, 계속 변하는 세상에서 경쟁할 수 있고 무엇보다도 새로운 것을 스스로 만드는 즐거움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 비록 소수라도 누군가는 관심을 가질만한 내용이 있다면 블로그에 올릴 것입니다. 언젠가는 alphageek라는 이름에 걸맞는 블로그를 만들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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