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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가 내게 물었던 질문 

정유진 웹서비스 기획자

가끔 카테고리만 남아있는 빈 블로그들을 마주칠 때가 있어요. 주인장의 게으름이나 노선 변화로 인해 처음 한 두 개 포스트 외엔 남아있지 않은 썰렁하게 버림받은 블로그들이죠. 거기에서 주인장이 만들어 놓고 내팽개쳐 버린 카테고리를 들여다 보고 있으면 싱긋 웃게 되요. 그가 원래 블로그에 대해 어떤 원대한 꿈을 품고, 어떤 목적을 수행하려고 했는가. 세상의 모든 정치, 문화, 예술의 총망라라든가 리눅스와 오픈소스의 종합 레퍼런스라든가 하는 맨 처음의 이상들이 눈에 그려지거든요.바로 이런것 처럼요.
2003년 b2로 만들었던 유진이의 맨 처음 블로그 카테고리
(지금보니 이대로 꾸준히 밀어부쳤더라도 꽤 근사한 웹기획 전문 블로그로 성장해 왔을 거라는 아쉬움이 드네요)

그런데 웹세상을 아우르는 멋진 웹컬럼니스트의 이상을 품고 블로그에 뛰어들었건만, 얼마 지나지도 않아 상황은 이런 식으로 전개되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죠.

컬럼이 쓰기 싫고 다른 것들이 쓰고 싶어졌어요. 세상과 숨바꼭질 놀이라로 하듯이 들키면 아웃이라도 당할 것 같아 꼭꼭 숨겨놓았던 마음의 가닥들이 하나 둘씩 고개를 쳐들기 시작하는데, 저도 깜짝 놀랬어요. 내가 이렇게나 할 말이 많은 사람이었던가...??

그 때, 저에게 블로깅이란 이전의 내 삶에 존재하지 않았던 특별한 체험였고, 조금 부풀려 본다면 세상과 나 사이에 놓인 징검다리였던 것 같아요. 그 낯선 세계에 발을 디뎌놓으며 나의 어디까지가 여기에 보여질 수 있는지, 새로 접한 이 세상은 안전한 것인지, 이 많은, 소위 블로거란 사람들은 대체 숨어 어디있다가 지금 이렇게 쏟아져 나온 것인지, 어떻게 이렇게들 블로그에 대해서 잘 알고 있으며, 블로거란 사실만으로 이렇게 서로 친한 척을 할 수 있는 것인지 등등 이상한 블로그 나라의 유진이에겐 궁금한 것도 신기한 것도 모두 많았죠.

그런데 저만 그런 것은 아니었나봐요. 2003년 가을에서 2004년 봄까지 가장 많이 받았던 질문은 단연 "블로그가 뭐예요?" 였거든요. 블로그의 정의에 대한 열정적인 토론도 많았고, 싸이월드가 블로그다 아니다 지금은 별로 신경쓰지 않는 그런 주제도 중대한 이슈였고, 제가 몸담고 있는 IT 업계로 좁혀본다면 당시에 업계 상황이 별로 안 좋았는데 블로그가 덕분에 취직하거나 새로 좋은 직장 구하게 된 사람들도 꽤 많고 그랬어요.

저 역시 여기저기 불려나가 블로그에 대한 발표도 하고, 글도 쓰고 했는데요. 물론, 사적인 당황스러움과 흥분감은 모두 감추고 제법 의젓하게 블로그는 개인 미디어라는 둥, unedited voice of a person이라는 둥. 지금 돌이켜 보면 조금 쑥쓰러운 것 같아요. 그래도 웹기획자로서의 끼를 발동해, 블로그를 비즈니스에 접목시켜 보자는 설익은 아이디어도 내 보고 그랬지만요.

지금은 굳이 블로그가 무엇인지에 대해 그렇게 심각하게 캐묻지 않죠? 왜냐면 어떤 것인지 모두들 해봐서 다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질문이 멈춘 그 자리에서, 오히려 더 중요한 질문이 시작되는 것 같아요. 블로그가 무엇인지가 아니라 블로그가 나에게 무엇인지.

처음 블로그하는 흥분과 신기함에 마치 숨쉬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것처럼, 매일매일 쉼없이 포스트를 올리던 때도 있었어요. 새로운 것을 보기만 해도, 맛있는 것 신기한 것 무엇을 접해도 블로그에 올릴 생각만 들고. 심지어 영화를 보거나 음악을 들을 때 조차도 온통 이 순간을 블로깅으로 옮길 생각 뿐. 영화를 본 감상을 쓸 때도 있었지만, 영화 본 이야기를 빌어 그 누구에겐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한 적도 있었어요. 친구에게 보낼 편지를 대신한 적도, 이건 너 때문이야! 라는 억울한 심정의 토로일 때도 있었구요. 블로그가 개인 신문고도 아닐진데....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그 순간을 사는 대신 순간을 블로그로 옮기려고만 하는 자신이 되게 사이비처럼 느껴지는 때가 오더라구요. 공연을 가서 음악을 느끼는 대신 공연자 사진이나 몰래 찍어오려고 하고(보통 촬영금지니까), 생각없이 지극한 사적인 이야기를 올렸다가 익명의 공격적인 코멘트로 기분이 상하는 일도 생기고. 스스로 잘나보이고 싶은 허접한 욕망의 산물인지 머리에 쥐가 나게 되는 뭐 그런.

세상과 닿아있는 한 아무리 주장해도 여기는 내 비밀 일기장은 아니구나. 어디까지는 쓸 수 있지만, 어디서부터는 내놓을 수 없구나. 그렇다면 그 어디까지가 과연 어디까지여야 할까. 그런 것도 다 새로 생각해 보게 되었어요. 또 내가 예측하지 못했던 다양한 사람들이 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좀 불편해 지기도 하고. 설익은 생각이나 감정을 세상에 내놓는다는 것을 살짝 겁내게 되기도 하구요. 더 잘 쓰고 싶기도 하고 아예 안 쓰고 싶기도 하고 오락가락 좀 혼란한 상태도 이어지고.

실은 블로그가 아니라, 삶이 중요한 것인데. 이것저것 말로 떠들어 대는 것보다는 열심히 잘 사는 것이 제일 중요한 것인데. 블로그와 네트워크를 말하지만, 실은 포스트 하나 올리는 것 보다는 친구 만나 술 한 잔 하는 것이 더 농밀한 네트워킹인데. 블로그 라이프 1년쯤을 보낸 작년 봄에는 그런 생각을 많이 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열병의 후유증이랄까. 그러니까, 질문하게 되는 것이죠. 블로그가 뭐냐가 아니라, 블로그는 나에게 무엇인가를.

결국 가다보면 그건 블로그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삶에 대한 나 자신의 태도에 관한 물음이었지만. 이렇게 묻고 답하는 그 과정에서 성장해 갔던 것은 블로그의 포스트 수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었어요.

그리고 그 답은 사람의 DNA가 모두 고유하듯이, 모두 다 다를 것 같아요. 한 후배는 늘 따끈따끈한 맛집 정보들로 블로그를 채우는데, 그 후배 소망은 정말 알짜백이 맛집 정보 블로그를 만들고 싶대요. 또 다른 친구는 새로 개척해 가고 있는 마사지와 아로마 요법에 대한 치료 사례들도 올리고 정보도 공유하면서, 셀프 마케팅의 발판을 만들고 있어요. 덕분에 꽤 입소문이 나서 손님들이 늘고 있다나요. 이렇게 비교급으로는 평가할 수 없는 소중한 의미들이 블로그에 쌓여가는 풍경들은 참 기분좋게 만들죠.

이제 저는 블로그 쓰는데 큰 고민도 안 하고, 매일매일 열정적으로 블로그에 매달려 살지도 않아요. 블로그 초창기 때 한참 돌았던 블로그 10계명 중 하나로 기억하는 짧게라도 매일 쓴다!에 비추어 보면 저는 아주 불성실한 블로그족이예요. 그런데 뭐랄까. 고민을 안 하고 조금 덜 관심을 기울이게 되니 오히려 자연스러워 졌다고나 할까. 강박이나 집착은 물론 블로그에 관한 여러가지 고민에서 벗어나 그냥 편해지는 시기가 오던데요.

지금도 올바른 이야기를 한다는 것과 그냥 생각나는 이야기를 아무렇게나 던져 놓는다는 것 사이의 어디쯤엔가 제 포스트들은 떠다니고 있어요. 그냥 가급적 솔직한 내 느낌에 충실하려고 하고, 심한 검열의 잣대는 들이대지 않으려고 해요. 조금 틀려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여유롭게 생각하려고 하구요.

단 하나의 포스트로 결론지어 버리기엔 더 미묘한 문제들이 인생엔 훨씬 더 많지만, 그래도 마음 속에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차오를 때, 그냥 하나의 포스트로 되는 데까지 써 봐요. 오늘 못 쓰면 내일 쓰고, 쓰면서 생각도 정리도 하고, 미처 다 못다한 말들을 담아두었다가 곰씹어 보기도 하면서. 그렇게 정리를 해 보면, 확실히 머리 속이 편해지고 기분 좋은 카타르시스가 느껴져요.

단 지키고픈 원칙 하나는, 블로깅 때문에 잠을 줄이지는 말자! :-)

이런 블로그의 질문들에 답하면서, 가장 깊이 깨닫게 된 일이라면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에는 똑바로 상대방의 눈을 바라 보고, 말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소중한 것을 지키는 나만의 방식에 대하여...이렇게 공개된 공간이 있기에 공개함으로써 그 소중함을 기쁘게 세상과 공유하는 방식과 때로는 여기가 있음에도 내 속에 머무르게 함으로써 그 소중함을 더욱 마음 깊게 뿌리내리게 하는 것 모두 내 진심이 문제일뿐. 어디에 무슨 말을 하는가 하는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게 되었어요.

너무 많이 스스로에게 캐묻기 보다는, 날을 세우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심인지를 재려하기 보다는 소중한 것을 일구어 가는 자의 뿌듯함으로, 그 힘으로 열심히 살아갈 수 있기만을 스스로에게 바라면서 말이죠.

아흠...이미 떼어놓을 수 없는 일상의 한 부분으로 굳어져버린 무언가에 대해 쓴다는 건 어려운 일인 것 같아요. 출근길에 마을 버스를 타는 것이나 가끔 운동삼아 공원에 산책 나가는 것이나 뭐 그렇게 너무나도 당연하게 이유나 의미를 묻지 않고 습관처럼 그냥 거기에 존재하는 것을 새삼 어떤 목적을 가지고 새로운 눈으로 다시 돌아본다는 것은요. 이제 저에게는 블로그도 그렇게 되어버린 것 같네요.

그래도 또 다시 묻게될 순간이 오겠죠. 블로그가 너에게 뭐냐고. 지금과는 또 달라질 내 인생에서 블로그의 정체를 묻게 될 거예요. 그래서 질문은 이래야 하는 것 같아요. 블로그는 '지금' 나에게 무엇이냐고. 그에 대한 답은 늘 다를 거고 그 답을 찾아가다보면, 블로그는 그 때마다 다른 색채를 띄면서 인생을 풍요롭게 덧칠해 줄 좋은 아이디어를 많이 쏟아내줄 거예요. 지금까지 블로그가 저에게 그러했듯이. 그렇게 저를 키워왔듯이.

정유진님 블로그 바로가기
by 블로그 | 2005/02/14 13:50 | 블로그 에세이 | 트랙백(2) | 덧글(5)
Tracked from 먼지는 어디든 간다 at 2005/02/20 14:39

제목 : 공감 백배의 블로그 에세이!
블로그가 내게 물었던 질문 무엇보다 '공감'가는 블로그 에세이였다. 역시나 중요한 건 (온라인 만큼) 오프라인에서의 살 부대낌의 접촉인 것이다. ^^...more

Tracked from Coffeeholic at 2006/02/18 20:24

제목 : 다시 공간설명
블로그가 내게 물었던 질문 이글루에 들어오기 전에는 모 포탈사이트에서 제공하는 블로그에서 꽤 오랜 시간을 보냈다. 이제는 아는 사람도 생기고 즐겨보는 블로그도 생겼다. 하지만 내가 모르는 사람들이 순수하게 블로그를 통한 소통을 위해 접속하는 경우보다는 아는 사람들이 내 블로그에 들러 글을 남기고 나도 블로그를 통해 그들에게 나의 ......more

Commented by 이장 at 2005/02/15 13:47
동감 | 교감 | 통감 | 공감
Commented by 팟찌 at 2005/02/15 17:00
1년이 넘는 블로깅 라이프를 하면서 제가 겪었던 심정과 비슷해 많이 공감갑니다..
Commented by jely at 2005/02/16 13:52
나와 함께 성장하고, 성장하는데 도움이 되는, 블로그 원츄~ ^-^b
그나저나 유진님, 오우~~ 여기서 뵈니 더더욱 반가워요~~
Commented by 먼지 at 2005/02/20 14:28
동감 | 교감 | 통감 | 공감에 동감!
Commented by splim at 2005/05/08 20:16
잘 읽었습니다. 저도 종종 '주객전도'되는 기분이 들 때가 있어요.
블로그가 내 머리 꼭대기 위에 앉아있는 듯 하면 자신에게 화가 나죠.
그래도 소중한 이유는, 홈페이지든 블로그든 포스트를 쓰면서
글 내용이 나아지는 것은 잘 모르겠지만,
확실히 저는 덕분에 조금씩 성숙해가고 있기 때문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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